제국의 슬픔제국의 슬픔

Posted at 2009. 1. 4. 12:36 | Posted in 카테고리 없음



p.180  아이러니하게도 국난이 닥쳤을 때 용감하게 앞장서서 헌신하는 사람은 그동안 국가의 혜택을 받았던 사람들이 아니라, 평상시에 뜻을 세우지 못했던 민간인들이다. 이를테면 강호에서 쥐 죽은 듯 살고 있던 평범한 백성이나 유약한 서생들이 주를 이룬다. 샤젠융은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이렇게 일침을 가했다.

"태평성대에는 천하가 고관과 귀인의 수중에 있지만, 위험천만한 난세에 이르면 천하는 평범한 백성들의 것이 된다"

참으로 절묘하고 통쾌한 지적이다. 이것이야말로 '천하흥망, 필부유책' 이라는 말에 대한 최고 해석이 아닐까 싶다. 즉, 국가가 흥성할 때는 보통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몫이 없지만,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보통 사람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의미다.

p.227  거짓말과 강경 노선은 동전의 양면이나 다름없었다. 거짓말을 하기 전에는 누구나 강경 일변도를 걸었고, 강하게 나서다가 결국 거짓말에 물들게 되었다. 대부분의 거짓말은 큰소리만 쳤던 기존의 강경 노선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여기서 얻은 결론은 간단하다. 거짓말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일방적이고 호전적인 매파 성향부터 근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p.246  기왕 전쟁에서 패했다면 남은 것은 상대에 대한 도덕적 비난뿐이다. 중국인들이 1840년에 일어난 전쟁을 굳이 아편전쟁이라고 부르는 데에도 그러한 심리가 작용되었다. 사실 영국인들이 전쟁을 일으킨 궁극적인 목적은 절대 아편의 밀거래에 있지 않았다. 영국 입장에서 당시의 전쟁은 아편 수입을 강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통상을 요구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교적 평등과 통상을 요구하는 방법이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선택뿐인가 하는 문제는 영국 내부에서도 이견이 많았던 부분이다. 그래서 영국 정부가 입안한 대 중국 전쟁 사안은 당시 271표 대 262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겨우 통과되었고, 심지어 반대파들은 의회 변론에서 이를 '아편 전쟁' 이라 부르며 심하게 반발했다. 결국 ' 아편전쟁' 이란 표현은 영국인들이 그들 정부를 풍자하면서 탄생한 말이었다. 영국 반대파들이 사용했던 표션을 그대로 써도 문제될 것은 없지만, 만일 그것을 정말 '아편전쟁' 이라고 여김으로써 일종의 도덕적 우월감을 얻고자 한다면, 그 자체가 아편 중독의 징후는 아닐까?

p.338  한나라 지방 행정 제도의 우수성은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시스템에 있었다. 당시의 행정 단위는 군과 현 2개가 전부였고, 중앙도 3개급에 지나지 않았다. 단계가 적고 효율이 높으면 부패의 가능성도 적어지는 법이다. 현 위에 군이 있고, 군 바로 위에 중앙이 있으니, 중앙 정부가 아득하고 높기만 한 존재라는 느낌을 덜 수 있었다.
등급이 간단해서 좋은 또 다른 한 가지는 관직의 단계가 적어 승진이 빠르고, 그만큼 관리들의 미래가 밝아 일에 대한 적극성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점이다.  서한 시대 중앙 정부의 최고 관리는 사실상 '삼공' 과 '구경' 두 등급 뿐이었다. 구경, 즉 9개 부서의 장관 혹은 '장관급 관리'는 관봉 2천석을 하사받았다.
지방도 2등급으로 나뉘었다. 가장 낮은 급수는 현이었다. 큰 현의 행정 장관인 현령은 6백~1천석의 봉급을 받았고, 작은 현의 행정 장관인 현장은 3백~5백 석을 받았다. 현 위의 군 단위 행정 장관은 처음에 수守라고 불리다가 경제 때 태수太守로 개칭되었는데, 관봉 2천 석을 하사받았다. 이처럼 군수는 중앙의 구경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서한시대의 군은 대략 100여곳에 이르고, 각군당 10~20개 현을 관리했다. 이렇게 보면 당시 군수는 지금의 주지사와 흡사했다.
100여명의 군수가 중앙의 구경과 동급 대우를 받은 것은 무슨 의미일까? 군수가 구경으로 발령받는 일은 결코 낯선 광경이 아니고, 구경에 있다가 군수로 발령받아도 전혀 억울할 게 없다는 뜻이었다. 관리 간의 문턱이 낮아 상호 개방적 이동이 비교적 용이했던 것이다. 현장들은 구경의 장관이 될 수는 없어도 군수가 될 수 있는 희망은 있었다. 현장과 군수 사이를 가로막는 다른 장벽이 없었기 때문에 노력에 따라서 한달음에 고급 관리의 대열에 합류할 수도 있었다. 심지어 잘만 하면 중앙으로 진출할 수도 있으니 현장들은 평소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므로 한나라 지방 정치 제도는 가장 이상적이었고, 관리들의 공무 집행도 체계적이었다.

...... 한 무제는 원봉 5년(기원전 106년) 천하를 13개 주부로 나누고, 각 주마다 자사를 파견했다. 사실 자사는 행정관이 아니라 중앙이 지방관 감시를 목적으로 파견한 특별 감찰관이었다. 당시만 해도 그들은 황제의 조서를 받들어 감찰 업무만 수행할 뿐 지방 행정에 관여할 수 없었다. 고정 관공서도 없었고 봉록도 6백 석에 불과했다. 그런 그들이 지방관들에게 무슨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겠는가? 자사는 1급 지방관리가 아니었고 주도 1급 지방 행정 단위의 개념이 아니었다. 한 무제 때만 해도 이로 인한 분란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한 성제 수화 원년(기원전 8년)에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자사가 목牧이 되면서 봉록도 2천 석으로 올랐다. 이후 자사라는 명칭과 목이라는 명칭을 번갈아 가면서 사용했고, 그 사이 주도 점점 지방 행정의 실세가 되어갔다.

...... 청대의 행정 체제는 총독 관할 구역, 성, 도, 부, 주현 총 다섯 개 급으로 세분화되었다. 그 결과 관리를 감독하는 관원들은 불어나는데 반해 백성들을 관리하는 관원들은 갈수록 줄어드는 기현상이 출현하였다. 백성들을 관리하는 관원들은 수적으로도 열세였지만 지위나 권력도 보잘것 없었다. 주현 위에 지부가 존재하고, 지부 위에 도대가 있고, 도대 위에 포정사, 안찰사가 버티고 있었으며, 포정사와 안찰사 위에 순무가, 순무 위에 총독, 총독 위에 조정이 있었다. 따라서 제일 아랫부분인 주관, 현관들의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엄청난 무게로 압박해 오는 수많은 상사들을 상대하느라 진이 빠질 지경이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백성들을 보살필 시간이나 여력이 없었음은 당연했고, 지방 정치 또한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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